우리 집 뒷산에 누군가 가전제품을 버리기 시작하면서 텔레비전이 무려 열 대 가까이 버려졌다. 어떤 놈은 모로 처박히고 어떤 놈은 나무 둥치에 버젖이 걸터앉아 있기도 하다. 로뎅의 조각처럼, 백남준의 비디오아트처럼 그 놈들은 각기 무언가를 열심히 사유하고 있었다. 햇빛의 방향과 농도에 따라 끊임없이 수신된 이미지를 화면에 주사했다. 놀라운 일은 화면에 비추어진 모든 것들이 살아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죽은 듯 고요하다가 일순 생생한 바람이 떠오르면 함께 떨며 몸부림치는 풀잎과 나무들, 온 산에 가득한 텔레비전들이 밤마다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오래전에 몬트리올 Place-des-Arts 에 부속건물인 Contemporary Art Museum 에 여러개를 붙여놓은 텔레비전 브라운관에서 계속 신경을 거스르는 화면이 반복되는 백남준의 작품이 전시된 적이 있었다. 이제는 그 고철덩어리같던 작품에서 나온 인식이 팽창하고 다듬어져서 브라운관을 버리고 벽면에 디지털 영상으로 장식된 것을 보면서 예술이 일상에 미치는 힘에 감탄을하곤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하던가? 갖다버린 텔레비전이 시인의 눈에 닿으니 다시 살아나서 예술이 되질 않는가. 이야기꽃을 피운다고하질 않는가. 우대식 시인은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