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사유
류근
다시 연애하게 되면 그땐
술집 여자하고나 눈 맞아야지
함석 간판 아래 쪼그려 앉아
빗물로 동그라미 그리는 여자와
어디로도 함부로 팔려 가지 않는 여자와
애인 생겨도 전화번호 바꾸지 않는 여자와
나이롱 커튼 같은 헝겊으로 원피스 차려 입은 여자와
현실도 미래도 종말도 아무런 희망 아닌 여자와
외항선 타고 밀항한 남자 따위 기다리지 않는 여자와
가끔은 목욕 바구니 들고 조조 영화 보러 가는 여자와
비 오는 날 가면 문 닫아걸고
밤새 말없이 술 마셔주는 여자와
유행가라곤 심수봉밖에 모르는 여자와
취해도 울지 않는 여자와
왜냐고 묻지 않는 여자와
아,
다시 연애하게 되면 그땐
저문 술집 여자하고나 눈 맞아야지
사랑 같은 거 믿지 않는 여자와
그러나 꽃이 피면 꽃 피었다고
낮술 마시는 여자와
독하게 눈 맞아서
저물도록 몸 버려야지
돌아오지 말아야지
————————————————————————————————————————-
70년대 말 ‘영자의 전성시대’라는 조선작 작가의 소설이 영화화되어서 평단의 주목을 받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회를 지배하는 남성작가들의 안타까운 시선으로 여자는 영자거나 ‘별들의 고향’의 경아거나간에 맘 내키는 대로 나꿔챘다가 또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아무 때나 버려도 괜찮은 존재였을까. 어쩌면 많은 남성들은 스스로 결핍된 자궁의 고향에서 탯줄을 끊지 못하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쇼핑몰에 벌렁 드러누워 엄마에게 발버둥치는 치기를 벗어나지 못한 채 몸만 커버린 건 아닐까.
혹자는 류근을 두고 ‘그의 시에서도 여자는 밥 혹은 몸이다.’ 라고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여성에 대한 폭력적인 가치관을 가진 자로 폄하하지만 오히려 그가 여성을 소비하는 사회를 조선작이나 최인호처럼 고발하는 거였다면 억울할만도 하다. 한 사회가 성장하고 발전하는 동안 수많은 영자와 경아는 지금 어느 거리에서 어떤 모습으로 서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