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트리올 사람 15

 

어느 늦은 봄날 가로등은 혼자 밤을 지키기가 너무 적적해서 슬그머니 어린 포도넝쿨을 꼬드보았다.

그날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군가가 잠 안 자고 지켜본 것은 사실 아니다.

다만 포도넝쿨이 갑자기 훌쩍 자라서는 가로등의 바지가랑이를 붙잡고 기어오르기 시작한 것뿐.

건너편에서 착실히 살림을 늘려가던 푸성귀동네에서는 늘 심드렁하던 호박꽃이 귀를 바짝 세우고 꿀벌은 분위기에 휩쓸려 온 여름내 제일 바빴다.

시내 한복한, 퀘벡대학 기숙사 건물에 둘러싸인 아담한 뜰에서는 은행나무와 목련나무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내 잘못이 아니라고만 수군거렸다.

차들이 질주하는 큰 길을 지척에 두고 아무도 포도넝쿨이 여름내 그리 빨리 자라서 어린 열매들을 졸망졸망 매달고 대책 없이 가을을 맞을 줄은 가로등도 정말 몰랐을 것이다.

그리로 몬트리올 사람 하나 아침 저녁으로 지나다니며 이 풍경을 눈여겨보고 있을 때 포도넝쿨도 차마 제 입으로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걸었다고.

 

가을이 아직 오지 않았는데 여름은 어느새 가버린 것 같다. 유난히 비가 많았던 이번 여름은 햇빛이 적어서 포도가 잘 익어갈 수 있을 지 걱정이 된다. 우리가 사는 동네 어귀에 눈 여겨 볼만한 이야깃거리가 있다면 정 붙이고 살만하지 않을까. 이 시는 올해 6월  MKLCC (Korean Language and Culture) Festival 1부에서 소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