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 이야기
남진우
내 낡은 모자 속에서
아무도 산토끼를 끄집어낼 수는 없다 내 낡은 모자 속에 담긴 것은
끝없는 사막 위에 떠 있는 한 점 구름일 뿐
내 낡은 모자 속에서 사람들은
파도소리도 바람소리도 들을 수 없다 그러나 깊은 밤 내 낡은 모자에 귀를 갖다대면
기적소리와 함께 시커먼 화물열차가 달려나오기도 한다
내 낡은 모자를 안고 오늘 나는 시장에 갔다
하지만 해 저물도록 아무도 사는 이 없어
나는 구름과 놀다가 기차를 타고 훌쩍
머나먼 사막으로 떠났다
누군지 모르는 그대여
내 낡은 모자를 사다오
달리는 화물열차 끝에 매달려 오늘도 나는
내 모자를 쓸 그대를 찾아 헤맨다
마술사가 모자 속에서 토끼를 꺼내고 새를 꺼내고… 하는 것이 시인이 언어를 가지고 마술을 부리는 것과 어떻게 다를까? 알리스가 꿈 속에서 이상한 나라를 헤메는 것처럼 시인은 언어로 지은 이상한 나라 안으로 독자들을 데리고 들어간다. 그 나라를 그대의 모자 속에 넣어두어도 좋다. 남진우 시인은 1981년에 동아일보에 시가, 1983년에 중앙일보에 평론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