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양희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 머위 잎 몇 장 더 얹어 뒤란으로 간다.
저녁만큼 저문 것이 여기 또 있다.
개밥바라기별*이
내 눈보다 먼저 땅을 들여다본다
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쪽도 볼 수 없다
논둑 길 너머 길 끝에는 보리밭이 있고
보릿고개를 넘은 세월이 있다
바람은 자꾸 등짝을 때리고, 절골의
그림자는 암처럼 깊다. 나는
몇 번 머리를 흔들고 산속의 산,
산 위의 산을 본다. 산은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
푸른 것들이 어깨를 툭 친다. 올라가라고
그래야 한다고. 나를 부추기는 솔바람 속에서
내 막막함도 올라간다. 번쩍 제정신이 든다
정신이 들 때마다 우짖는 내 속의 목탁 새들
나를 깨운다.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 산 옆구리를 끼고
절벽을 오르니, 千佛山이
몸 속에 들어와 앉는다.
내 맘속 수수밭이 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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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읽고 나서 다시 읽으면 가슴이 저며온다. 어떤 고통 속에 일어서서 쓴 시일까… 세상의 길에서 등을 돌리고 산 사람이 이제 세상과 화해하려고 산에 오른다. 죽어서 만들 수 있는 길은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시인의 수수밭이 환해진다. 이대로 세상을 용서하시라. 천양희 시인은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마음의 수수밭’으로 소월시 문학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