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

능소화

문성해

담장이건 죽은 나무건 가리지 않고 머리를 올리고야 만다

목 아래가 다 잘린 돼지 머리도 처음에는 저처럼 힘줄이 너덜거렸을 터

한 번도 아랫도리로 서본 적 없는 꽃들이

죽은 측백나무에 덩그렇게 머리가 얹혀 웃고 있다

머나먼 남쪽 어는 유곽에서도

어젯밤 그 집의 반신불수 딸이 머리를 얹었다고 한다

그 집의 주인 여자는 측백나무처럼 일없이 늙어가던 사내 등에

패물이며 논마지기며 울긋불긋한 딸의 옷가지들을 바리바리 짊어 보냈다고 한다

어디 가서도 잘 살아야 한다

우툴두툴한 늑골이 어느새 고사목이 되어도

해마다 여름이면 발갛게 볼우물을 패는 꽃이 있다.

     

    여름이면 덩굴을 내며 피는 능소화가 늘어진 집들에 유독 눈길이 간다. 울타리 너머로 세상을 엿보는 그 환한꽃이 시인에게는 아랫도리 못쓰는 처녀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시인의 마음이 세상의 아픔을 향해 열려있다.

문성해 시인은 1998년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200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단에 나왔고 시집으로는 ‘자라’, ‘아주 친근한 소용돌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