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
이창수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겨 담을 넘었다
그녀는 담 넘어 온 나를 보고
큰소리로 웃으며 쪽문을 가리켰다
담을 넘은 용기는 간 데 없고
그녀가 가리키는 쪽문으로 도망 나왔다
그럴 거면 왜 담을 넘었느냐며
친구들이 놀려댔다
그 이후 아무리 낮은 담이라도 쳐다보지 않았다
담을 넘어 골목으로 흘러나오는
맑은 웃음소리가
젖은 이마를 씻겨주는 저녁
아주 오래 전 내가 넘었던 담벼락에
핀 예쁜 꽃이 보였다
나를 만나고 싶다면 저 문으로 들어오라고
쪽문을 가리켰던 긴 손가락이
오랜 미련을 흔드는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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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쯤은 그랬을 것이다. 여학생 뒤를 슬금슬금 따라갔다가 차마 말도 붙이지 못하고 그 집 담벼락에 기대서 마냥 그 소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던 때가 한번쯤은 있었을 것이다. 그 집에 넝쿨 장미라던가, 능소화 늘어져 피어 유혹하듯 까르르 웃을 것만 같던 그런 날. 이창수 시인은 2000년 ‘시안’으로 등단 시집으로 ‘물오리 사냥’, ‘귓속으로 운다’ 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