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 읽는 소설 7 – 안전빵 내 구역, 작은댁 할머니네

신기하게 땅만 보고 걷는데도 이 마을에선 누구네 집 누구네 집을 잘도 찾아간다. 땅만 보며 엄마 생각을 하면 눈물 날 때가 많지만 오늘은 외롭지 않은 날이라 신난다. 이제 다음은 작은댁이다.

작은댁은 원재 삼촌네라고 부른다. 원재 삼촌이랑 기재 삼촌이 작은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사는 집이다. 작은댁 할머니는 나의 비밀 친구 같은 그런 분이다. 나에게 먼저 말도 걸어주고 나를 불러 맛있는 밥도 자주 챙겨 주신다. 작은댁 할머니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도 그 누구도 들려주지 않는 나와 엄마에 대해 제일 많이 얘기해 주시는 분이다.

내가 엄마 마음을 아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면 그건 아마도 작은댁 할머니 덕분이다. 나에 대해 엄마에 대해 나의 아기 때부터 여섯 살인 지금까지에 대해 작은댁 할머니는 많은 걸 알고 계신다. 내가 엄마를 보고 싶어 하는 것도 엄마를 미워하지는 않는 것도 원재 삼촌네 할머니는 알고 계신다.

엄마와 내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원재 삼촌네 집 앞에 도착했다.

엄마 곁으로 좀 더 가까이 가도 되는 안전지대에 온 셈이다. 엄마도 작은댁에서는 내가 열 걸음쯤 뒤에 서 있어도 뒤를 힐끔 보거나 헛기침을 한다든지 눈을 깜빡이는 등 어색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마침 점심 상을 차리던 원재 삼촌네 식구들. 추석이라 시집간 명란 이모도 이모부랑 아장아장 걷는 한 살배기 딸이랑 같이 온 것 같다. 아기가 있어서 그런지 작은댁 할머니네는 웃음이 넘친다. 원래 이 마을에서 가장 따뜻한 집이 원재 삼촌네이긴 하지만 오늘은 더 정스럽다.

“저 왔어요. 명란이도 딸이랑 왔구나! 정인이가 언제 이렇게 컸어! 벌써 걷는구나. 어머 너무 귀엽고 예쁘다.”

엄마가 정인이를 안아 본다. 정인이가 엄마에게 방긋방긋 웃어준다. 아기가 엄마를 보고 웃으니 기분이 이상하다. ‘내가 정인이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엄마도 나를 저렇게 안아준 적이 있겠지! 있을 거야!’라며 잘 기억나지 않는 어떤 날들을 억지로 떠올리는 내가 싫기도 하다.

여하튼 갑자기 그 자리를 빨리 떠나고 싶어진다. 그래서 엄마 곁에서 조금 떨어져 멀뚱멀뚱 대문 밖을 내다본다. 지나가는 마을 강아지에게 다가가 괜히 말도 붙여 본다. 쨍쨍한 햇볕에  눈이 부신 하늘만 애꿎게 나무라며 외할아버지 집 옥상으로 향한다.

원재 삼촌네랑 우리 외할아버지 집은 얼마나 가까운지 모른다. 외할아버지 집 삼층에 있는 옥상과 원재 삼촌네 앞마당과 연결되는 마을 길 사이에는 시멘트로 지은 다리 하나가 있다. 외할아버지네 집 옥상에서 그 다리 하나만 건너면 작은댁 할머니네 집이다.

거기다 어른들 말씀에 따르면 엄마의 큰할아버지와 원재 삼촌의 할아버지가 형제지간이셨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큰댁 할머니네도 아마 엄마의 할아버지의 형제지간으로 대손을 따지자면 꽤 가까운 집안인 걸로 안다. 이 마을이 순흥 안씨 집안 집성촌이라 워낙 모두 가족처럼 지내는 건 맞다. 그래도 애써 족보를 정리하자면 외할아버지네 바로 옆집 큰댁과 윗집 작은댁은 그중에서도 꽤나 가까운 집안임에는 틀림없다.

어린 내가 이해하기에 실수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뜻 들은 어른들의 집안 이야기는 나에게 무지 도움이 되었다. 이 마을에서 엄마 없는 아이라 가장 외로우면서도 옆집 큰댁 윗집 작은댁이 다 진짜로 가족이었다니 갑자기 외롭지 않은 기분이 들어서다. 비록 몇 대를 거쳐 올라가야만 더 가까운 한 식솔이지만 그럼 어떠한가. 중요한 건 나도 이 마을의 가족이란 것이다.

명란 이모 딸 안아주는 엄마에 괜스레 불뚝해서는 아까부터 옥상에 머물며 해가 어디쯤 떠 있나 찾아보고 있었다. 해의 걸음새를 보면 엄마가 언제 집으로 가셔야 하는지 조금은 알 수 있다. 그 시간쯤에 할 일들도 미리 정해 놓을 수 있어 엄마 온 명절날엔 꼭 옥상엘 몇 번 올라와 본다. 꼭 한 살 먹은 아이에게 질투만 나서 옥상에 죽치고 있는 건 아니다. 그림 그리기라든지 종이접기라든지 무엇인가 다른 것에 몰두해야만 엄마가 집에 가시는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엄마를 보고 있지만 안 보는 척하며 무언가에 정신을 쏟고 있어야 한다. 그러기엔 옥상만 한곳도 없다.

여느 때처럼 하늘을 보니 ‘엄마가 한 네 시간 뒤엔 집에 가시겠구나’ 하는 것을 알겠다. 엄마가 집에 갈 시간에 대비한 마음의 준비라도 할 겸 옥상 붙박이로 있는 것이다. 친척들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넘치는 명절날엔 나 홀로 옥상에서 이별 전 의식을 치른다.

“현아야 밥 먹어! 현아야 어디 갔니? 현아야 옥상에 있니? 어서 내려와! 숙모 이모들 먹을 때 너도 같이 먹어야지! 현아야!”

큰외삼촌네 숙모가 점심을 먹으라고 나를 부른다.

민소하
국어국문학 전공후 등단, 작사가 구성작가 신문기자 등 글과 함께 살다 몬트리올로 이주했어요.
웨스트 아일랜드 거주 11년 차, 네 아이들의 육아맘으로 틈내어 글쓰기를 합니다.
네이버 블로그 – 민소하의 소설&에세이 SO S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