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가 치는 날
(국토 21)
조태일
별안간 눈보라가 치는 날은
처음엔 풍경들은 풍경답게 보이다가는
그 형체들은 끝내 소리도 없이 묻힌다.
눈보라가 치는 날은 술을 마시자
술을 마시되 체온을 생각해서 마시자
눈보라가 치는 날은 술을 마시자
술을 마시되 야간의 낭만을 위해서
국경선을 떠올리며 마시자.
눈보라가 치는 날은 술을 마시자
술을 마시되 실어증을 염려해서
두근거리는 가슴 열고 홀로라도
열심히 말을 하며 마시자.
눈보라가 치는 날 술이 없으면 어찌하나,
눈보라가 치는 날 국경선이 안 떠오르면 어찌하나,
눈보라가 치는 날 두근거리는 가슴 없으면 어찌하나,
신문지 위에나 헌 교과서 위에다가
술잔을 그리고 새끼줄이라도 칠 일이다.
앨무새 입부리라도 그리고
ㄱㄴㄷㄹㅁ ㅂㅇㅈㅊㅋㅌㅍㅎ,
이런 자음이라도 열심히 그릴 일이다.
신문이나 교과서의 글씨가 안 보일 때까지
눈이 침침할 때까지, 뒤집힐 때까지
그리고 또 그릴 일이다.
눈보라가 치는 날은
처음엔 풍경들은 풍경답게 보이다가는
그 형체들은 끝내 소리도 없이 묻히니
삼선개헌과 유신선포로 이어지던 암흑기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은 연작시 ‘국토’중 하나인 이 시는 절망의 냄새가 난다. 한 십년동안 이런 시들이 멀지감치 물러나있다가 귀신이되어 다시 다가온다. 이런 시가 읽히는 시대가 다시 다가올 때는 교묘해서 깨어있는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 시킨다.
조태일 시인은 전남 곡성에서 대처승 아버지의 칠남매중 4째로 태어나 깊은 산속에서 산짐승과 어울리며 성장했다. 곡성까지 영향을 미친 여순사건을 넘기고 광주로나와 전남고등학교를 마치고 경희대 국문과에 입학한 후 2학년때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아침선박’이 당선되면서 식칼과도 같은 시를 써내려갔다. 그가 끝끝내 끌어안았던 국토에서 누가 그에게 술을 권했는지 살펴봐야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