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밤 식탁
송수권
어느 고샅길에 자꾸만 대를 휘며
눈이 온다.
그러니 오려거든 삼동(三冬)을 다 넘겨서 오라
대밭에 죽순이 총총할 무렵에 오라
손에 부채를 들면 너는 남도 한량이지
죽부인(竹夫人)을 껴안고 오면 너는 남도 잡놈
댓가지를 흔들고 오면 남도 무당이지
올 때는 달구장태를 굴리고 오너라
그러면 너는 남도의 어린애지
그러니 올 때는
저 대밭머리 연(鳶)을 날리며 오너라
너가 자란 다음 죽창을 들면 남도 의병(義兵)
붓을 들면 그때 너는 남도 시인(詩人)이란다
대숲마을 해어스름녘
저 휘어드는 저녁 연기 보아라
오래 잊힌 진양조 설움 한 가락
저기 피었구나
시장기에 젖은 남도의 밤 식탁
낯선 거집(巨接)*이 지나는지 동네 개
컹컹 짖고
그새 함박눈도 쌓였구나
그러니 올 때는
남도 산천에 눈이 녹고 참꽃 피면 오라
불발기 창 아래 너와 곁두리 소반상을 들면
아 맵고 지리고 그로테스크한 홍어의 맛
그처럼 밤도 깊은 남도의 식탁
어느 고샅길에 자꾸만 대를 휘며
눈이 온다.
*거집 : 큰 손님(過客)
“우리 밥상을 지켜낸다는 것은 얼마나 더디고 힘겨운 싸움인가. 이것이 곧 풍류 속에 들어 있는 검약과 절제의 정신이다. 이 정신이 퓨전 식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 민족혼도 민족정서도 죽는다.”고 송수권 시인은 남도의 식생활문화에 대한 글 속에서 밝혔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한상궁이 장금이에게 맛보인 홍어의 삭힌 맛이 이 시 속에 되살아나면서 눈오는 겨울 배경 삼아 멋과 맛이 어우러진 동양화 한 폭 떠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