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차례
김명인
그가 떠나면서 마음 들머리가 지워졌다
빛살로 환한 여백들이
세찬 비바람에 켜질 당할 때
그 폭풍우 속에 웅크리고 앉아
절망하고 절망하고서 비로소 두리번거리는
늦봄의 끝자락
운동모를 눌러쓰고 몇 달 만에 앞산에 오르다가
넒은 떡갈잎 양산처럼 받들고 선
꿩의밥 작은 풀꽃을 보았다
힘겹게 꽃 창 열어젖히고 무거운 머리 쳐든
이삭꽃의 적막 가까이 원기 잃은 햇살 한 줌
한때는 왁자지껄 시루 속 콩나물 같았던
꽃차례의 다툼들 막 내려놓고
들릴락 말락 곁의 풀더미에게 중얼거리는 불꽃의 말이
가슴속으로 허전한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벌 받는 것처럼 벌 받는 것처럼
꽃 진 자리에 다시 써보는
뜨거운 재의 이름
시든 화판을 받들고 선
저 작은 풀꽃이 펼쳐내는 이별 앞에
병든 몸이 병과 함께 비로소 글썽거리는, 해거름
독 자들은 이 시에서 상처에 겹겹히 덮여있는 갈피에서 뿝어져 나오는 치명적 아름다움을 읽어낼 수 있을까… 평론가 이광호는 ‘김명인의 시는척박한 변경의 경험을 드러낼 때조차도 결연한 아름다움을 내장한다…’고 했다. 꽃차례는 꽃대에 꽃이 붙는 순서를 말한다. 작은 풀꽃이 진 자리에 자신이 서보는 마음으로 삶을 조명하는 시인이 소멸하는 생명에 다가가는 결연한 아름다움으로 목이메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