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의 끝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

시인은 열병을 앓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쩡한 백일홍 처럼 붉게 붉게 성장했을 것이다. 언제적 일이었을까, 그렇게 온힘을 다해서 뻗쳐오르던 시절은, 그리하여 마침내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때는 정말 여름의 끝자락 이었을까. 

이성복 시인은 ‘문학과 지성’으로 등단했고, 불문학 교수이며 ‘김수영 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