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깃발, 서럽게 펄럭이는

 

그 깃발, 서럽게 펄럭이는

 

박정대

 

기억의 동편 기슭에서

 

그녀가 빨래를 널고 있네, 하얀 빤스 한 장

기억의 빨랫줄에 걸려 함께 허공에서 펄럭이는 낡은 집 한 채

조심성 없는 바람은 창문을 흔들고 가네, 그 옥탑방

사랑을 하기엔 다소 좁았어도 그 위로 펼쳐진 여름이

외상장부처럼 펄럭이던 눈부신 하늘이, 외려 맑아서

우리는 삶에,

아름다운 그녀에게 즐겁게 외상지며 살았었는데

 

내가 외상졌던 그녀의 입술

해변처럼 부드러웠던 그녀의 허리

걸어 들어갈수록 자꾸만 길을 잃던 그녀의 검은 숲 속

그녀의 숲 속에서 길을 잃던 밤이면

달빛은 활처럼 내 온몸으로 쏟아지고

그녀의 목소리는 리라 소리처럼 아름답게 들려 왔건만

내가 외상졌던 그 세월은 어느 시간의 뒷골목에

그녀를 한 잎의 여자로 감춰두고 있는지

 

옥타비오 빠스를 읽다가 문득 서러워지는 행간의 오후

조심성 없는 바람은 기억의 책갈피를 마구 펼쳐 놓는데

내 아무리 바람 불어간들 이제는 가 닿을 수 없는, 오 옥탑 위의

옥탑 위의 빤스, 서럽게 펄럭이는

우리들 청춘의 아득한 깃발

 

그리하여 다시 서러운 건

물결처럼 밀려오는 서러움 같은 건

외상처럼 사랑을 구걸하던 청춘도 빛 바래어

이제는 사람들 모두 돌아간 기억의 해변에서

이리저리 밀리는 물결 위의 희미한 빛으로만 떠돈다는 것

떠도는 빛으로만 남아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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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것들은 아름답다…고 해야 한다면, 현재의 창을 통해서 지난 시간의 궁핍했던 사랑을 떠올리며 멕시코 시인 ‘옥타비아 빠스’와 ‘옥탑 위의 빤스’를 겹쳐놓는 시인의 상, 하위 상상력과 장난처럼 표절하는 오규원 시인의 ‘한 잎의 여자’가  불편하지 않은 까닭이다. 이상과 백석의 그녀들이 떠오르며 아련하고 미안하고 그러나 지금, 아무것도 할 수도 해줄 수도 없는 한 남자를 시인으로 만나게 해주는 시 한편 함께 읽어보자.

박정대 시인은 1990년 문학사상에 ‘촛불의 미학’ 등 6편의 시로 등단했고 ‘야무르 기타’ 등 3권의 시집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