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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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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r. Joseph Chung - Column
 정희수 칼럼



목회자는 이웃사랑이 근본적으로 자기교회의 구성원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해야 하는데 오히려 반대로 교인이 자기교회에 남아있게 하려는 잘못된 목회관을 유지 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어떤 목사는 자기교회를 떠나면 저주받는다고 공갈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목회자는 자격이 없는 목회자다.
이웃사랑의 비결은 이렇다. 첫째 이웃은 모든 사람이다. 이웃은 자기교회의 교인, 다른 교회의 교인 그리고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 모두 이웃이다. 둘째, 하나님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실 때 이웃은 세속적 기준에 따라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평가하고 사랑하라는 것이다. 상대방이 “친절해서,” “교양이 좋아서,” “아름다워서,” “정직해서,” “유식해서,” 등등이 기준이 되면 안 된다. 하나님의 기준은 상대방이 하나님의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현상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장점이 있고 단점이 있다. 인간은 모두 다 죄인이다.  인간적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루터(Luther)의 말같이 조건부사랑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웃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이 되어야 한다. 셋째,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이웃사랑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면 겸손, 이해심, 동정심, 봉사정신 및 기타 여건이 자연스럽게 형성되기 때문이다.
한편 이민 한인 기독교인의 문제는 “성스러운 행동”과 “세속적 행동”을 엉뚱한 기준으로 차별 한다는 것이다. 성스러운 행동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행동이고 세속적 행동은 교회 밖에서 일어나는 행동으로 정한다. 교회 안에서 먹는 음식은 성스럽고 집에서 먹는 음식은 세속적이고 성스럽지 않다는 것인가? 성경에서 관련된 사건은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서 상업을 하는 것에 대해 진노를 하신 사건이다. 성스러움의 기준은 행동의 유형이 아니고 행동의 목적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행동은 성스럽다. 인간의 개인의 영광, 권세 및 이익을 위한 행동은 세속적이고 성스럽지 않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행동이라도 개인 혹은 일정 집단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이것은 성스럽지 않다.
몬트리올 한인 기독교인 중 많은 분이 한인공동체의 행사는 세속적이기 때문에 참여를 하지 않는다 한다. 또한 목회자들 중 교인들의 참여를 막는 경우도 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명을 잘못 이해하는 행동이다. 예를 들어 어떤 단체에서 세대간 갈등에 대한 세미나를 한다 하자. 이러한 세미나의 목적이 젊은 세대의 기독교신앙 강화라 하자. 교회 밖에서 일어나는 행사이기 때문에 세속적 행동이라고 주장하여 참여를 안 하거나 못하게끔 압력은 가하면 이는 비기독교적 행위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인생의 90% 이상이 교회 밖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인생의 전부를 관리 하신다. 따라서 성스러운 일을 교회내의 행동에 제한다면 하나님의 사역을 경시한다는 죄를 범하게 된다.
8.6 비기독교인과의 관계
기독교인은 세계화로 인해 불교인, 이슬람교인, 힌두교인 등 비 기독교인들과의 접촉이 가속화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문화의 기반은 유교와 불교이기 때문에 기독교와 불교/유교와의 관계를 의식해야 한다. 북미의 종교다원화는 가속화되고 있고 종교 쇼핑(Shopping)이 일상생활이 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기독교인은 타 종교인과 어떠한 관계를 개발해야 하느냐의 과제를 안게 된다.
세계 모든 종교를 취급하는 신학을 종교신학(Theology of Religions)이라 한다. 기독교의 비기독교에 대한 자세는 크게 포옹주의(Inclusivism)와 배타주위(Exclusivism)로 구분된다. 후자는 비 기독교인은 구원을 받지 못하고 지옥에 간다고 주장한다.  플로런스 총회The Council of Florence)(1431-1445)는 바로 이것을 주장했다. “성경에도 그런 뜻의 구절이 있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마태복음 25:41)  1960년에는 시카고에 있던 순복음 교단의 회의에서 제 2 차 대전 후10억 이상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이 사람들이 지옥에 갔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편 전자(포옹주의)는 기독교 신앙이 없어도 평생 기독교인같이 산사람은 구원을 받는다는 학설이다. 가톨릭 신학자 라너(Karl Rahner)는 이러한 말을 담긴 서신을 1946년에 교황에게 보냈다.. “구원을 받는데 교회의 구성원이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교회에 가고자 하는 의욕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의욕은 반드시 외형화 할 필요는 없다. 개신교 신학자 중에서 특히 진보경향의 신학자는 비기독교인의 구원에 대해 신축적 견해를 보인다.
비기독교인의 구원 문제는 앞에서 토의한 예정론과 연관이 있다. 전통 신학자는 대부분 예정론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다원화 시대를 맞이하여 비기독교 종교와의 협조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종교갈등이 세계평화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즉 기독교가 비기독교를 이해하고 포옹해야 하는데 포옹수준 혹은 배타수준이 무엇이냐가 어려운 과제다. 즉 기독교에 대한 충성 (Commitment) 및 개방성(Openness)과의 균형이 과제다.
신학자 니터(W.C. Placher, Essentials of Theology 2003 속에 있는 Paul Knitter 의 논문, PP. 302-318) 는 4 개의 비기독교와의 접촉 유형을 제시한다. 즉 교체모형 (Replacement Model), 성취모형 (Fulfillment Model), 상호모형 (Mutuality Model) 및 승인모형(Acceptance Model) 이 바로 그러한 모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