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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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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r. Joseph Chung - Column
 정희수 칼럼



“기독교인의 삶은 하나님을 찾는 개개인의 인생합계가 아니다. 이는 기독교 순례자와 성도들이 보여준 관계적 집단적 생활 양식이다. 이러한 생활양식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관계성 행위와 유사하다.” (Christian life is not an aggregate of individuals in pursuit of their experience of God, but a communal way of being in which Christian pilgrims and disciples display relationship and behavior akin to how Christ displayed relationship and behavior.) (William C. Placher, Essentials of Christian Theology 2003, P. 283) 


현 기독교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가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개인적 구원추구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신앙을 자기와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천당을 개인적 축복이라고 착각한다. 세례란 우리가 예수님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데 뜻이 있다.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인류의 죄를 위해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고 죽은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으로 인해 부활한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개인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지 않았다. 그분은 인류의 죄를 위해 희생하셨다. 즉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인간 공동체의 구원을 위해 희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자면 개인의 구원은 공동체 구원의 일부분이다.


신학자 배틀 (Michael Batttle: Placher 저서Essentials of Theology 2002 PP. 280-295)에 따르면 서구의 개인중심의 구원론은 계명시대에 도입된 개인의 지성 및 의지의 우월성에 입각한 잘못된 신앙관이라 지적한다. 데카르트(Descartes)는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Je pense, donc je suis)라는 명언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기독교 신앙에도 영향을 주어 개인구원의 신앙관이 전개되어 오늘날까지 유지된다는 것이다. 한인 기독교는 서구 기독교보다 더 개인위주의 신앙이다. 만약 공동체구원을 자기가 속한 교회만을 생각한다면 문제가 있다. 배틀에 의하면 기독교인이 선언해야 할 것은 “우리가 있다. 따라서 내가 있다.” (I am, because we are.) 라는 것이다.


배틀은 또 기독교 신앙 생활이 일상 생활과 완전히 분리 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신앙 생활은 교회 생활에 제한된다는 것이다. 예배 때는 “주여! 주여!” 하면서 찬송가 부르고 기도하고 눈물도 흘리고 보기에는 깊은 신앙을 외형화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일단 교회를 떠나면 남을 비판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한다. 이러한 신앙생활을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생활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참다운 기독교인은 교회의 구성원이고 동시에 인류사회의 구성원이다. 따라서 개인의 구원은 속하는 공동체의 구원이고 공동체의 구원은 개인의 구원이다. 여기서 교회라고 말하는 교회는 믿는 사람들의 집단을 말한다; 갈은 교회를 다니는 집단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사랑대상인 이웃은 좁게 보면 교회이고 더 넓게 보면 인류 전체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제대로 먹을 수 있고 적합하게 옷을 입고 정상적인 가옥에서 살기를 원하신다.  왜냐하면 모두 하나님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진리가 사회를 지배하고 사회정의가 넘치는 사회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신다” (데모데 전서 2:4) 지금의 인간사회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세상과는 거리가 멀다. 인류의 80%가 의-식-주라는 기본요구를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개도국에 있는 수 백만의 아이들이 배고픔 때문에 죽어 가고 있다.  자본주의의 소득분배제도 때문에 빈부격차는 계속 악화되고 있다. 


한편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자연의 관리를 의뢰하셨다, “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고 그것을 정복하라. 그리고 바다의 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 위에 움직이는 짐승을 다스려라.”(창세기 1:28) 여기서 “그것을 정복하라” 라는 한글 번역은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다. 


영어 성경은 “control” 라고 표현한다. 즉 정복이 아니고 “조정” 이 더 적합한 표현이다. 문제는 인간의 욕심 때문에 자연이 파괴되고 많은 종류의 동식물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현상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현실이 아니다. 인류사회는 심각한 병에 시달리고 있다. 신학자들은 이 병을 사회적 죄(Social Sin)라 한다. 덧붙여서 사회적 죄는 개개인의 죄를 더욱 악화시킨다. 이들은 사회적 죄로 인해 개인의 죄가 더 커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기독교 교회가 이 사회적 죄를 무시하고 지나 갈 수 있나? 원칙적으로 볼 때, 교회는 사회의 양심이고 사회윤리를 이끌어 갈 의무와 책임이 있다. 개개인 기독교인은 스스로 혹은 소속교회를 통해 사회적 속죄를 위해 기도하고 동시에 사회적 및 정치적 운동에 참여해야 한다.


그러면 과연 한인 이민 기독교인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기독교인의 의무를 다하느냐? 불행하게 답은 부정적이다. 우선 그들의 공동체 개념이 소속 ‘개교회’에 국한 된다는 것이다. 원래 교회는 하나이다. 그런데 몇몇 종교 지도자 및 신학자들의 주관적 진리의 해석으로 인해 수 많은 교파가 등장했다. 더 심각한 것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공동체를 소속 개교회로 국한시킨다는 것이다. 소속교회 교인수가 50명도 안되는데 그것이 유일한 교회라고 생각하고 비기독교적 패쇠적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비극적 및 희극적 현상은 자기교회에 다니다가 다른 교회로 가면 “신앙이 부족해서,” “헌금이 부담되어서” 혹은 “협조정신이 모자라서” 등 어처구니없는 이유를 대면서 비난한다. 떠나가는 이유가 그 교회에 남아있으면 신앙의 위협을 받는다는 것을 생각 못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기독교인으로서의 기본 자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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