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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드릭의 휴가

NDG 사람들 한카타임즈 by  조회 수:285 2015.09.30 13:04


그는 지금 참는 중이다. 그러나 이내 눈물이 터진다. 서러웠다. 두 주먹으로 눈물을 훔친다.


할아버지가 돌아 가셨다. 병상의 할아버지는 힘없이 그의 손을 잡고 마지막 말씀을 남기셨다. “세드 ! 먼저 월등해져라. 평등은 그 다음 요구하는 것이란다. 그리고 엄마, 아빠를 너무 미워하지 말거라. 사랑한다. 네가 세상을 너무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아빠와 엄마는 10년전 이혼하셨다. 엄마는 카레이서 새아빠를 따라 온타리오주로 이사했고 아빠는 직장에서 만난 새엄마와 샹블리에 새집을 구입하여 역시 이사하셨다. 9살 세드릭은 할머니집에 홀로 남겨졌다. 세드릭은 한참을 어리둥절해야 했다. 이 모든 낯선 상황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가 자신을 버렸다는 데 생각이 미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린 세드릭의 상처는 컸다. 무얼 해도 즐겁지 않았고 가슴속에 까닭모를 분노가 남몰래 차츰 쌓여 갔다. 엄마를 만나면 왜 자기를 버렸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세드릭은 지난 10년간 한번도 엄마를 볼 수 없었다. 아빠는 아주 가끔 그를 찾아 와 주었다. 대화는 없다. 장난감이며 먹을 거리를 잔뜩 사 가지고 와서 놀이공원이나 영화관에 그를 데려 가면서 짧은 안부를 물어 오는 외에 아빠는 별 말이 없었다. 세드릭도 그저 물끄러미 아빠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곤 했다.


자라면서 세드릭은 말수가 더욱 주는 대신 생각이 많아졌다. 자애로운 할머니와 세상 가장 큰 사람인 할아버지가 굳건히 그의 뒤를 지켰지만 엄마와 아빠는 그에게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와도 같았다. 순간의 생각만으로도 그는 고통스러워 했다.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버려졌다는 생각은 그의 자존감을 통째로 흔들어 놓았다. 학업에 관심이 갈 수 없었다. 세드릭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것으로 더 이상의 진학을 포기했다. 간곡히 설득하는 할머니에게 미안했지만 세컨더리에 가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대신 세드릭은 할아버지가 일하는 자동차 메카닉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메카닉 사장 찰리는 매우 활달한 성격의 사람 좋은 보스로서 세드릭의 처지를 동정해 마지 않았다. 그는 자동차를 정비할 때마다 세드릭을 불러 그 과정을 하나하나 설명하며 보여 주었다. 불과 3년이 지나지 않아 세드릭은 자동차 정비에 관한 한 더 배울게 없을 만큼 성장했다. 이내 천재 꼬마 정비사의 소문이 동네에 퍼져 나갔다.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칭찬도 사람들 사이에 오고 갔다. 세드릭의 늘 구부정했던 어깨가 조금 펴졌다.


아빠의 직업은 트럭커다. 경력 27년차의 노련한 트럭커이지만 여전히 트럭운전수이다. 친구들 아빠의 경우 처럼 그 흔한 팀장, 부장 같은 호칭이 아빠에게는 없다. 하지만 아빠는 트럭업계에서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지난 27년 동안 거의 모든 종류의 트럭을 빠짐없이 운전해본 데다가 트럭커가 만날 수 있는 각종의 트럭사고를 경험하고 이를 해결하는 와중에 트럭의 메인트넌스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가 된 것이다. 아빠의 오렌지색 피터빌트 트럭에는 아빠가 자랑하는 대형 툴박스가 실려져 있다. 아빠는 어떤 형태의 고장도 순식간에 수리해낸다. 아빠의 한껏 치장한 디럭스 389 트럭이 트럭스탑에 서면 트럭기사들이 우르르 모여 든다. 간단한 안부인사에서부터 트럭 고장으로 다음날 토잉트럭을 기다리는 기사들까지 아빠를 만나려 야단이 난다. 단거리, 중거리는 물론 침대 두개짜리 장거리용, 그리고 호텔급 시설을 갖춘 디럭스 트럭.. 100여대의 트럭이 늘어선 트럭스탑에서 이처럼 한바탕 유명세를 치룬 후라야 아빠는 겨우 레스토랑이나 샤워룸을 이용할 수 있었다. 아빠도 여느 트럭기사처럼 처음에 company driver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어엿한 owner operator, 지입차주다. 자기 소유의 트럭을 회사에 지입해서 수입의 약 20~25%를 회사에 내는 조건으로 로드를 받는 것이다. 미국, 캐나다 하이웨이는 안가본 곳이 없고 아직도 월 만오천 마일은 끄덕없는 아빠다. 지난 2007년 영화 트랜스포머가 처음 나왔을 때 세드릭은 당시 아빠의 차였던 피터빌트 379 트럭을 발견하고 맘속으로 환호했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 샤이아 라보프가 범블비를 통하여 만난 오토봇 군단, 아빠의 트럭이 옵티머스로 변하고 그들이 디셉티콘에 맞서 샘과 큐브를 지킬때 세드릭은 자신이 아빠로부터 보호받는다는 느낌을 처음 받았다.


엄마가 보고 싶다. 그러나 엄마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의 엄마에 대한 기억은 목소리와 향기가 전부다. 엄마는 정말 예쁜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놀지 말고 숙제하라는 말조차도 기껍게 들릴 정도였다. 그리고 엄마의 향기.. 엄마는 랑방 애호가였고 랑방의 너무 무겁지 않고 잔잔하게 남는 그윽한 향기는 엄마의 향기로 그의 기억에 깊숙이 남았다. 세드 ! 엄마 뽀뽀 ! 세드 ! 저녁 먹어야지 ! 세드 ! 세드 !.. ..


어느날 찰리의 메카닉에 소형 아우디가 한 대 섰다. 세드릭은 안에서 밴의 브레이크 드럼을 교환하고 있었다. “여기요, 거기 누구 계신가요 ?” 세드릭이 얼어 붙었다. 그건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엄마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어 바깥을 본다. 아니다. 한 소녀가 서 있다. “안녕하세요 ? 제 차에 조금 문제가 있는 것 같아서요..” 다행히 찰리가 소녀를 응대했다. “어떤 문제이지요 ?”.. 소녀는 차를 맡기고 돌아 갔고 찰리가 아우디를 리프트에 올렸다. 세드릭과 함께 점검에 들어간다. 차량에 특별한 문제는 없었다. 고속 주행시 조향이 조금 이상하다고 한 것은 휠얼라이먼트때문이었고 그 외에 드로틀밸브와 본네트 내부 청소로 간단한 점검과 수리가 끝났다. 주차를 위해 차에 오른 순간 세드릭이 멈칫한다. 차안에 은은히 흐르는 향기.. 세드릭은 폴 이리브의 금색 프린트에 하토가 디자인한 조각난 멜론 모양 뚜껑의 둥근 검은색 아르페쥬 향수병을 보았다. 저건 집안 곳곳을 장식했던 엄마의 향수병이다. 주차를 마치고 돌아오는 세드릭의 마음에 그리움의 눈물이 차오른다.  

얼마후 소녀의 아우디가 다시 찰리의 메카닉을 찾았다. 엔진오일의 교체를 위해서다. 지난번 교체후 약 2000km를 주행했을 뿐인데 소녀는 오일교체를 요청하였다. 세드릭은 차량에 다가가지 않았다. 류크가 오일을 교체하고 주차를 마쳤다. 그러나 소녀는 이미 찰리의 단골 고객이 되어 있었다. 어느날 소녀의 전화가 찰리를 찾았다. 마침 부재중이어서 세드릭이 전화를 받는다. 아우디가 소녀의 집밖에서 출력 부족으로 멈춰서버렸다고 한다. 소녀의 아우디는 디젤엔진과 DPF시스템을 탑재한 신형모델.. 세드릭은 원인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작년 아빠의 미국런에 동승했을 때도 같은 문제로 차가 도로에 선 적이 있다. 엔진이 아예 멈춰버린 것은 아니지만 아빠는 이상을 발견하고 차를 즉시 도로 갓길에 세웠다. 회사에 긴급메시지를 전송하자 오피스에서 비용을 충분히 지불할테니 직접 수리하여 운행해달라는 답신이 온다. 대기시간과 토잉트럭 비용, 수리비 등을 모두 고려하면 그 편이 회사입장에서는 훨씬 빠르고 저비용의 해결이 되기 때문이다. 아빠는 그동안 같은 문제로 3번이나 어려움을 겪어서인지 아예 부품까지 싣고 다녔다. 토잉트럭 대기시간인 18시간을 보너스로 받아 인근 명소를 관광했던 기억이 기분 좋게 남아 있다. DPF는 배기가스 후처리장치다. 디젤엔진에서 배출되는 PM(Particulate Matter : 입자상 물질)을 포집한다. DPF 재생이란 포집된 PM을 배기열에 의해 태워 없애는 과정이다. 물론 이는 자가 클리닝 기능이므로 일정 이상 포집되면 스스로 작동된다. 보통 DPF 재생에 돌입하게 되면 출력이 심하게 떨어지는데 재생이 원활하지 않을 경우 주행이 어려운 경우도 발생한다. 아빠는 이 시스템이 2008년 이후에 제조되는 디젤엔진에 의무화되어 있는 반면 엔진에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불필요한 고장의 원인이 되어 트럭회사와 트럭커들이 고개를 젓는다고 했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2008년 이전의 중고 트럭이 시장에서 귀한 대접을 받는 숨은 이유라고 한다. 세드릭은 찰리에 연락했다. 그런데 토잉트럭이 쉬는 날이니 진단장비를 가지고 직접 가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장비와 부품을 챙겨 자신의 구형 투스카니의 시동을 건다.


세드릭의 짐작이 맞았다. DPF(Diesel Particulate Filter) 시스템 문제였다. 가지고간 스캐너로 시스템을 체크하고 부품 교체를 마쳤다. 그러자 소녀가 멀지 않은 차고로 주차를 부탁한다. 소녀의 집은 웨스트마운트 언덕 모퉁이의 대저택이었다. 리모트 컨트롤로 차고가 열리자 세드릭이 경악한다. 도어 4개의 대형 차고에 들어서 있는 차들 때문이다. 페라리 599 GTB, 람보르기니 무르시엘라고 LP670-4 SV, 코닉세그 CCXR이 차례로 세드릭의 눈안에 들어 온다. 하나같이 세기의 드림카들이다. 세드릭의 심장이 근래 가장 빠른 속도로 방망이질하기 시작했다. 눈이 뿌옇게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있는데 소녀의 음성이 들린다. “죄송하지만 맨 왼쪽 공간에 주차 부탁해요..” 엄마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다. 주차후 소녀는 차가운 음료라도 한잔 하고 가라며 세드릭을 거실로 안내한다. 마음은 분명 불편한데 세드릭, 홀린 듯이 그녀를 뒤따라 간다.


소녀의 이름은 사미라 빈트 하마드, 대학원생이라고 했다. 동안이었지만 세드릭보다 최소 너댓살이 더 많다는 얘기다. 자신은 중동에서 온 유학생이고 박사과정의 오빠와 함께 둘이서 지낸다고 한다. 오빠의 취미는 자동차 수집과 레이싱이지만 공부 때문에 차량은 대부분 차고에 주차되어 있단다. 세드릭이 차고의 차량에 관심을 보이자 오히려 미안해 하며 말을 돌린다. 하지만 세드릭은 참을 수 없다. 페라리는 이전에도 본 적이 있었지만 람보르기니 수퍼벨로체와 코닉세그는 말로만 듣던 한정판, 전설의 드림카다. 수퍼벨로체는 람보르기니의 DNA를 빛낸 186대 한정판으로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강렬한 역동성과 정교한 주행감을 자랑한다. 코닉세그는 1018마력 엔진, 최고시속 417km의 전설의 수퍼카다. 사미라는 제조회사의 역사와 차량 사양을 줄줄 외는 세드릭을 한참 바라다 본다. 이제 보니 파란 눈이 참 맑은 예쁜 소년이다. 학교에 다닐 나이에 왜 메카닉에서 일하고 있는지 궁금해 졌다. 세드릭이 담담히 대답한다. 십분이 채 지나지 않아 사미라는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뛰어 간다. 어린 나이의 인생이 이럴 수도 있구나 싶어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 그녀는 카타르의 왕족이다. 공주다. 타밈 빈 하마드 현 국왕가와는 먼 사촌이 된다. 아버지는 천방지축 오빠를 혼자 보내는 게 마음에 걸려 그녀를 함께 유학 보낼 결심을 했다. 오빠와 함께 옥스퍼드를 졸업하고 나란히 캐나다에 진학했다. 지난 세기동안 탈취, 선양, 이양, 왕세자, 왕세제 등으로 왕위계승에 뚜렷한 원칙이 없는 카타르다. 승계서열 안에는 그들 오누이도 있었다. 아버지는 캐나다가 유럽보다는 사람들 눈에 덜 띄일 것으로 생각했고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그들 오누이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없다. 차량이 워낙 눈에 띠기는 했지만 이곳은 웨스트마운트 지역이다. 수천만불을 호가하는 대저택도 드물지 않게 있는 까닭에 크게 주의를 끌지는 않았다. 자신의 투스카니에 오르는 세드에게 사미라가 말한다. 세드, 괜찮으면 편하게 놀러 오렴.. 너라면 난 언제든 환영이야.. 이 짧은 인사가 훗날 세드릭의 아주 특별한 휴가를 예약하게 된다.


그날 이후 세드릭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눈앞에 페라리, 람보르기니도 아른거렸지만 언제부터인지 사미라의 따뜻한 미소가 거기에 겹쳐진다. 잠 못 이루기는 사미라도 마찬가지였다. 사미라는 관심은 분명 동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지만 세드릭의 우수에 찬 파란 눈은 이상하게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다. 세드릭은 그녀가 자신의 신분을 밝혔을 때 깜짝 놀랐지만 차고문이 열릴 때만큼은 아니었다. 사미라는 화장실에서 펑펑 울고 나와 어떻게든 이 불쌍한 소년에게 힘이 되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를 보고 싶어 한다. 이때까지도 두 사람은 잘 모르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오묘한 사랑의 서막이 지금 그들 앞에 펼쳐지는 중이었음을..


두 사람은 이후 자주 만났다. 처음엔 사미라의 집이 대부분이었지만 데이트의 범위는 쉐브룩, 몽클랜드, 생캐서린, 올드 포트로 점차 넓혀졌다. 주말엔 세드릭의 투스카니로 일 페로, 브로몽, 생 소베를 달린다. 둘은 분명 누나와 동생 같았다. 사미라가 세드릭을 챙기고 세드릭은 사미라를 따랐다. 만남도 누나와 친한 동생의 그것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 사미라는 어떤 핑계를 대어서라도 세드릭을 만날 명분을 만들려 했고 세드릭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의 사랑을 느끼기 시작했다. 물론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제외하고다. 어느날 사미라가 세드릭에게 전격 제안한다. “세드 ! 나랑 같이 카타르에 한번 놀러 가지 않을래 ? 곧 할아버지 생신인데 오빠는 논문작성 때문에 움직이기 어려워 어쩌면 내가 가야 할 것 같애. 우리 함께 가자..“ 사미라는 내심 계획한 게 있었다. 카타르는 신분차별이 심하다. 카타르 국민은 태어남과 동시에 연봉 1억 수준의 복지 혜택을 누리지만 만일 외국인과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이 모든 혜택을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되고 이는 훗날 이혼하더라도 회복되지 않는다. 카타리(카타르시민)의 혈통 유지와 인구 증가 억제를 위한 왕실의 순혈주의 입법 때문이다. 왕족의 경우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사미라, 사랑의 일탈을 꿈꾼다.


집사 알리는 사미라편이었다. 그러나 이는 좋지 않다. 세드릭을 도하에 데려가는 것은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니라고 공주를 설득했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자칫 세드릭의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 무슨 방책을 세워야 했다. 알리는 변호사를 통하여 고용계약서를 챙겼다. 세드릭은 가라데의 고수로 공주의 경호원이 되었다. 나이가 조금 어렸지만 청소년대회 우승자라는 이력과 건장한 체격, 메카닉에서 다져진 구릿빛 피부의 근육 그리고 날렵한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아 다소 안도가 되었다. 출국 전날 알리는 세드릭을 불러 몇가지 주의를 당부한다. 카타르 왕실의 현 상황과 이질적 문화, 공주의 경호원으로서의 태도와 몸가짐 등이다. 그러나 세드릭은 여전히 지인을 따라 나서는 가벼운 마음이다. 그렇게 도하 공항에 도착했다.


리무진이 대기하고 있다. 길이가 족히 30피트는 되어 보이는 하얀색 링컨이다. 운전수는 사르왈 위에 솝을 걸친 아랍 정장을 하고 있었다. 현지 왕실의 경호원들이 세드릭을 제지하지만 공주가 손짓하자 그대로 물러 난다. 리무진은 도하 거리를 관통하여 어디론가 향한다. 꿈같은 휴가가 세드릭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미라는 집안 행사에 참석해야 했으므로 처음 3일간 세드릭에게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자유시간이라고는 하지만 세드릭의 신분이 공주의 경호원이므로 그의 보호를 위해 왕실 경호원 둘이 그의 보디가드 겸 가이드가 되어 주었다. 이슬람 아트 뮤지엄,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 I. M. 페이가 디자인한 이 박물관은 히잡을 쓴 여인을 형상화한 독특한 외관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컬렉션도 컬렉션이지만 웨스트 베이를 조망할 수 있는 아치형 발코니는 멋진 풍광을 자랑했다. 세드릭은 아치를 따라 한동안 왔다 갔다 한다. 아치 너머로 도하의 빌딩군이 보인다. 뉴욕의 맨해튼 못지 않다. 아라비아 반도의 끝자락에 서서 저녁 바닷바람을 맞으며 모처럼 세드릭의 마음이 평안해 진다. 사미라가 새삼 고맙게 느껴진다. 다음날엔 시내 알 사드에 위치한 알 카이마 레스토랑에 들렀다. 경호원 압둘라가 양갈비와 믹스 샐러드를 주문한다. 양갈비는 어떻게 요리했는지 양고기 특유의 잡내가 전혀 나지 않았고 샐러드는 이슬람 특유의 소스로 버무러져 식사 내내 식감을 자극했다. 점심 후에는 토치 도하 타워로 이동했다. 2006년 도하 아시안 게임이 열렸던 칼리파 스타디움 옆에 자리한 횃불 모양의 초고층 타워다. 내부에는 호텔, 레스토랑, 카페 들이 가득하고 도하의 대표적 쇼핑몰인 벨라지오몰과 연결되어 있어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었다. 밖에 나와서 보니 300m 높이의 초고층 타워가 마치 거대한 횃불을 켜놓은 것 처럼 빛을 발한다. 야간조명 탓이다. 압둘라가 다음날은 사막투어 일정이니 조금 일찍 자리에 드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한다. 세드릭도 하루종일 움직이느라 피곤한 터라 리무진에 가득한 술병들을 저리로 하고 숙소에 든다.


잠결에 엄마의 목소리를 들은 듯 하여 잠을 깨었다. 사미라가 경호원들과 이야기 하고 있었다. 사미라는 세드릭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 무얼 먹었는지, 어딜 제일 좋아했는지를 꼬치꼬치 물은 후에야 묻기를 그쳤다. 잠시후 방문이 살며시 열리고 사미라가 들어 온다. 세드릭은 얼결에 눈을 감고 잠이 든 척 한다. “세드릭, 예쁜 친구.. 이제 보니 우리 세드릭 잠든 모습도 예쁘네.. 더운데 온종일 돌아다니느라 힘들었나 보다. 내가 와도 전혀 모르고 잠만 자는 걸 보니.. 잘 쉬고 내일 만나. 안녕..” 세드릭의 입술에 사미라의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떨어 졌다. 이불 속 세드릭은 바들바들 경련 중이다. 들킬까 싶어 최대한 조심하고 있지만 가슴이 떨리고 숨이 가쁜건 참기 어려웠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는 것과 동시에 세드릭의 입에서 휴우 한숨이 흘러 나온다. 가만 입술을 만져 본다. 방금 닿았던 사미라의 감촉이 그대로 남아 있다. 내일까지는 집안 행사가 있다고 했는데 아마 조금 일찍 끝났나 보았다. 그나저나 어떡하지 ? 세드릭은 내일 사미라를 볼 일이 아득하다. 도저히 얼굴을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을 것만 같다. 그런데 또 이상하지 ? 그의 가슴에 알 수 없는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아마도 따뜻한 중동의 바람이겠지. 어쩌면 아라비아해의 사랑의 바람일런지도 모른다.


사미라와 함께 사막투어에 나섰다. 투어차량은 도요타의 대형 SUV 랜드크루저 ZX, 8기통 엔진에 사륜구동의 오프로드 전용 차량이다. 8인승이지만 운전석의 압둘라와 조수석의 페일 그리고 뒷좌석의 두사람이 전부다. 세드릭은 압둘라의 정체가 못내 궁금해진다. 그가 왕실의 경호원임을 몰라서가 아니다. 페일 말로는 태권도 세계 챔피언 출신에 왕실 최고의 명사수라고 했다. 그런 그가 도하의 명소도 모르는 게 없고 뒷골목 사정도 훤할 뿐 아니라 항상 여유있는 미소에 늘 다른 사람을 챙기는 넉넉한 인품의 소유자라는게 신기했다. 오늘은 60도 경사 사막의 모래언덕을 이리저리 넘는 현란한 운전솜씨를 유감없이 보여준 후에 고즈넉한 바닷가에 차를 세우고 사라지는 센스까지.. 압둘라가 페일을 끌고 언덕 너머로 사라져준 덕분에 세드릭은 사미라와 한동안 맨발로 바닷가를 산책할 수 있었다. 그는 둘 사이를 아는 듯 모르는 듯 했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무척이나 마음을 써준다는 것이었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낙타투어의 출발장소. 아마 사막의 마지막 관문인 듯 관광객들이 많이 대기하고 있었다. 기다란 목 미끈한 다리의 낙타가 입에는 헝겊 재갈을 문 채 그들 앞에 엎드렸다. 사미라가 먼저 올라 타고 이어 세드릭이 탔다. 경마를 잡힌 것은 아니지만 낙타가 끄덕이며 앞으로 나아갔고 언덕을 돌아 서니 이내 사위가 조용해진다. 관광객들의 소란을 뒤로 하고 낙타의 발자욱이 사막에 찍힌다. 아껴두었던 밤이 서둘러 내려 오고 지평선 위로 달이 떠오른다. 아아~ 압둘라..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다가와 모닥불을 피워 놓고 양탄자에 커피까지 준비해 놓고 왔던 길로 사라진다. 빛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사막에서 모닥불이 활활 타오른다. 세드릭이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사미라에게 키스한다. 사미라의 양볼을 살며시 쥐고서다. 사미라의 고개가 젖혀지며 가느다란 두 손이 그의 어깨를 부둥켜 안는다. 사막의 밤, 모닥불빛에 비친 이 아름다운 장면을 더는 묘사할 방법이 없다. 그만 압둘라를 호출해야겠다.. 처음으로 압둘라가 눈치없이 나타났다. 사실은 낙타에 오른 관광객 일부가 갈림길을 놓쳐 그들쪽으로 다가 오고 있음을 알리려 한 것이다. 충분했다. 세드릭의 가슴엔 이미 사랑의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동안 미처 불붙지 못했을 뿐이다.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도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확신도 그에겐 너무 소중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막에 누워 즈믄 별들을 바라보았다. 우주의 중심에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고아로 외로웠던 그동안의 인생이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세드릭의 어깨가 활처럼 활짝 펴졌다.


다음날 두사람은 문화예술의 마을 카타라를 거쳐 수크 와키프의 코르시니 야시장을 방문하였다. 국왕의 집무실 에미리 디완 왕궁이 바로 지척임에도 전통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서민 시장이었다. 다양한 음식점과 생필품 가게는 물론 카타르 전통의상에서부터 기념품, 건과류, 사탕, 벌꿀과 이국적인 물품, 동양의 향신료와 애완용 매까지 온갖 물건, 잡동사니들이 가득하다. 돌이 깔린 바닥은 미로와도 같아서 한번 들어 가면 여간 찾아 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아무런 걱정할 필요 없다. 오늘도 가이드는 어김없이 압둘라니까.. 높은 성벽과 성루의 알쿠트 요새를 마지막으로 숙소로 돌아 온다. 내일은 아쉽지만 캐나다로 돌아가야 한다. 사미라가 그 전에 할 일이 있다고 했다.


마지막 날 아침.. 사미라의 손에 이끌려 세드릭이 찾아 간 곳은 왕실의 한 집무실이었다. 백발의 혈색 좋은 노신사와 인자한 모습의 노부인이 그를 반긴다. “할아버지 ! 할머니 ! 제가 얘기한 세드릭이에요.. 아버지께 얘기 잘 해주셔야 해요. 저는 두분만 믿어요..” “아~ 네가 세드릭이구나.. 반갑다. 우리 손녀를 잘 부탁한다..” 세드릭을 바라보는 두 노부부의 얼굴에 만족한 웃음이 묻어난다. 동네에서도 할아버지 할머니는 모두 세드릭의 팬이었다. 적당히 큰 키에 선함이 가득 묻어 있는 파란 눈의 소년. 순수하면서도 왠지 힘이 느껴지는 얼굴. 동네 어르신들의 이런 저런 작은 심부름을 한번도 거절할 줄 모르던 그다. 꼭 황석공이 아니더라도 나이든 사람은 대개 안다. 소년의 순수한 마음과 행동은 사람들의 신뢰를 얻기에 충분했다. 압둘라의 환송을 받으며 두 사람은 리무진을 내렸고 비행 후에는 손을 꼭 잡고 도발 공항에 도착했다.


꿈같은 휴가를 마치고 세드릭은 다시 메카닉에 출근한다. 언제나와 다름 없는 나날이지만 많은 것이 변했다. 우선 세드릭의 어깨가 꼿꼿하다. 예전의 위축된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표정도 바뀌었다. 얼굴에 머물곤 했던 그늘이 사라지고 대신 웃음이 많아 졌다. 사소한 일에도 웃고 아주 작은 일에도 감사한다. 변화를 감지한 할머니께는 모든 것을 숨김없이 말씀드렸다.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등을 다독여 주셨다. 아빠는 아들을 부둥켜 안고 오래도록 우셨다. 이혼후 채 6개월이 지나지 않아 엄마는 사고를 당하셨다고 했다. 심각한 교통사고였고 새아빠는 현장에서 즉사, 엄마는 의식을 잃은 채 수술을 받고 그러고도 오랜 후에 겨우 중환자실에서 깨어나셨다고 했다. 뇌손상으로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지금도 요양원에 있는 엄마를 그동안 아빠가 보살펴왔다고 한다. 세드릭을 보면 너무나도 아픈 기억에 고통스러워 아빠는 아들을 마음처럼 자주 찾지 못하셨다고 한다. 언젠가 진실을 말해주어야지 하면서도 그동안 차마 전하지 못해 그것도 괴로웠다고 하신다. 세드릭은 평생의 수수께끼가 얼마간 풀리는 것을 느꼈다. 세상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라고 하신 할아버지의 말씀이 기억났다. 엄마 아빠가 이혼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버려진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퍼즐을 풀고 보니 아빠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빠는 과묵하지만 더없이 따뜻한 분이셨다. 양손에 선물꾸러미를 가득 들고 아들을 찾아 오는 아빠의 모습과 그 마음이 그려졌다. 함께 있을 때 언뜻언뜻 비치던 아빠의 눈물도 이해가 되었다. 반쯤 센 머리로 아들을 안고 우는 아빠를 그는 용서하기로 했다. 아빠는 연약한 심성의 소유자로 혼자만의 아픔을 차마 이겨내지 못하셨던 것 뿐이다. 세드릭은 아빠가 주신 요양원의 주소를 곱게 간직했다.


사미라의 전화다. 한껏 들뜬 목소리다. “세드 ! 마침내 아빠가 우리 사이를 허락하셨어. 아무래도 우리 도하에 한번 더 가야할 것 같아.. 이번에는 정식으로 인사드리고 오는 거야.. 아~ 할아버지, 할머니~ 감사합니다..” 세드릭은 애마 투스카니의 걸윙도어를 열고 시동을 건다. 사미라가 웨스트마운트 사거리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의 손에는 요양원의 주소가 쥐어져 있다. 그가 전화로 엄마를 찾아 보러 가려한다고 하자 사미라는 깜짝 반가워 하며 말했었다. “어머~ 그럼 오늘 시어머니께 인사드리러 가는 거야 ? 아이~ 예쁘게 보여야 하는데 뭘 입고 가지 ? 아~ 워낙 원행이니 오늘 돌아오긴 어렵겠네 ? 자기가 나 재워 주는 거 맞지 ?” 사미라의 이런 모습은 정말이지 생경하고 새롭다. 항상 누나 같았는데 언제인가부터 잔뜩 애교가 늘었다. 그런데 조금도 싫지 않았다. 아니 싫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세드릭은 이런 사미라가 좋아 죽을 지경이었다. “자기야~ 오늘도 일 많아 ? 나 오늘 시험 끝나는뎅..” “자기야~ 보고 시포.. 오늘은 집에 좀 꼭 들러 줘용..” 이렇게 가끔가다 말 끝에 이응자라도 붙는 날이면 아주 정신줄을 놓게 되는 것이다. 저기 신호등 사거리에 사미라가 서있다. 투톤 원피스를 아주 곱게도 차려 입으셨다. 차를 세우고 내려 걸윙도어를 열고 그녀가 타기를 기다려 다시 운전석에 가 앉는다. 압둘라의 교육은 효과가 있었다. 벌써 이번이 두 번째 휴가다. 장성한 아들이 결혼할 여자 친구를 차에 태우고 거의 10년만에 엄마를 보러 간다. 엄마의 목소리와 엄마의 향기를 가진 여친이다. 엄마가 아프시다고 하지만 그는 걱정하지 않는다. 10년 동안이나 아들을 보지 못하셨으니 아프신게 어쩌면 당연하다. 그는 엄마와 함께 찍은 어릴적 사진과 랑방 아르페쥬 향수도 준비했다. 엄마에 대한 원망은 이미 씻은 듯이 사라지고 없다. “엄마 죄송해요.. 엄마가 아프신지 몰랐어요. 알았다면 제가 면회라도 다녔을텐데.. 그럼 벌써 다 나으셨을텐데.. 엄마 용서하세요..” 살짝 고개를 돌려 사미라를 바라 본다. 그녀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만면에 웃음 가득한 얼굴로 노래를 흥얼거린다. 창 밖에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이 파랗게 그들을 축복하고 있다.


지나간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가올 모든 것에 긍정합니다. / 다그 함마르셀드